현대차 실적현황
상사에게 굽신거릴 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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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 6 시사저널


기업들' 합리적 인사평가제 도입…승진 마일리지·능력 점수화 ‘큰 효과’




일러스트 박성남



인사철이 돌아왔다. 입사 동기끼리도 희비가 나뉘고 있다. 희비를 가르는 잣대는 인사 고과. ‘이럴 줄 알았으면 상사에게 눈도장이라도 한번 더 찍을 걸’ 하고 후회하지만' 이미 버스는 떠났다. 아직도 많은 직장에서는 직속 상사가 ‘밥줄’을 쥐고 있기 때문에 상사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상사가 어떤 기준으로 점수를 매겼고' 내 인사 고과가 어떻게 매겨져 승진과 급여에 반영되었는지조차 알려주지 않는 기업도 있다. 그러나 모든 회사의 인사평가제도가 주관적이고 불투명한 것은 아니다. 합리적인 인사평가제도를 도입한 기업이 늘면서 기업의 인사 문화가 달라지고 있다.

인텔코리아 직원들은 인사철이 돌아와도 상사 눈치를 보지 않는다. 상사에게만 잘 보인다고 승진과 높은 연봉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텔코리아 직원이라면 누구나 위 아래 오른쪽 왼쪽까지 최소한 대여섯 사람으로부터 평가를 받는다. 함께 일한 동료와 상사' 업무 제휴가 있었던 다른 부서 상사와 후배 직원 등에게 360°로 평가받는다.

3개월 동안 평가·토론해 고과 매겨

예컨대 마케팅을 담당하는 오미례 이사는 자기 평가서를 스스로 작성하는 동시에 같은 부서 직원뿐 아니라 기획팀이나 인사팀 직원으로부터도 평가받는다. 기획팀 직원은 오이사와 함께 한 일 가운데 오이사가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 오이사만의 강점과 꼭 개선해야 할 점을 각각 3~5 가지씩 적는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논리 정연하게 작성해야 한다. 이 평가서는 오이사의 직속 상사에게 바로 전달된다. 상사는 그들의 평가서와 오이사의 자기 평가서를 분석해서 종합인사평가서를 작성한다.

물론 평가 내용에 대해서는 오이사에게 충분히 이야기하고' 본인이 수긍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치열한 토론을 통해 조정한다. 이 모든 과정이 끝나는 데는 최소한 석달 가량 걸린다. 오미례 이사는 “인사 고과를 하는 과정이 가혹하리만치 오래 걸리고 복잡하다. 하지만 여러 사람으로부터 객관적으로 평가받는 데다 내용이 모두 공개되기 때문에 최종 결과에 불만을 갖는 사람은 거의 없다”라고 말했다.

교육 전문 기업인 대교에서는 인사 고과가 발표되는 연말보다 연초에 오히려 상사와 직원의 신경전이 치열하다. 지난해부터 새로 도입한 인사평가제도 때문이다. 새로운 인사 평가 시스템에서는 연초 계획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따라 인사 고과가 달라진다. 연초에 세운 계획을 얼마나 달성했는가가 평가 잣대가 되기 때문에 팀원은 되도록 목표를 낮게 잡으려 하고 팀장은 높게 잡으라고 요구하면서 갈등이 생기는 것이다. 결국 양쪽 모두 한 발짝씩 양보하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지곤 한다.

대교는 직원들의 모든 업무를 점수화할 수 있도록 정량화했다. 업무 성적을 숫자로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마케팅 부서뿐 아니라 사업 지원 부서의 업무 내용도 일일이 점수로 매길 수 있도록 했다. 예컨대' 인사팀 직원의 경우 핵심 인력 유지율' 직원 1인당 생산성 증가율 등에 따라 점수를 매긴다. 따라서 부서장이 편견이나 입맛대로 직원의 인사 고과를 매길 수가 없다. 연초에 세운 목표와 결과를 놓고 점수를 내서 합산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 제도를 도입한 뒤 대교에서 가장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직원과 상사의 관계이다. 최승호 팀장(모바일에듀케이션 TF팀)은 “과거에는 고과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굽신거려야 했지만' 이제는 임원이라도 당당하게 만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또 과거에는 팀장이 지시하면 마지못해 움직였지만' 개인별 목표가 정해진 지금은 팀원 스스로 일을 찾는다고 덧붙였다. SK케미컬도 새로운 인사평가제도를 도입한 뒤 조직 문화가 크게 달라졌다. 과거에는 인사팀 권한이 셌는데' 평가와 보상에 대한 권한을 각 사업본부로 이전하면서 사업본부장 권한이 강해졌다. 그러나 모든 평가 지표를 객관화해서 사업본부장의 편견이 스며들 틈이 거의 없다. 이 회사는 특히 승진 마일리지제를 도입해 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위로 올라갈 길을 터놓았다. 종합평가등급에 따라 점수를 매겨 누적 점수가 높은 사람은 남보다 빨리 승진할 수 있도록 했다. 예컨대 이 회사는 직원들의 최종 성적을 S·A·B·C·D 다섯 단계로 나누는데' S만 계속 받을 경우 남보다 최고 7년이나 빨리 승진할 수 있다.

P&G코리아 직원들은 인사 평가를 한 해 계획을 세우는 계기로 활용한다. 이 회사 역시 자기 평가·다면 평가·상사 평가를 종합해서 고과를 매기는데' 평가 점수보다는 1년 간의 업무계획표 작성에 더 큰 비중을 둔다. 홍보팀 최병욱 실장은 “자기평가서에 들어가는 업무 계획표를 짜다 보면 지난 1년을 반성하고 앞으로 1년 동안 어떻게 일해야 할지 구체적인 목표가 생긴다”라고 말했다. 상사는 모든 평가서를 종합해서 결과를 알려주는데' 단점으로 지적된 것을 보완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조언한다.

잘 나가는 회사는 인사 평가도 잘한다

삼성·LG·현대자동차 등 주요 대기업들도 외환 위기 이후 객관적인 인사평가제도를 도입했다. 직원에 대해서는 객관화한 지표로 업적을 평가하고' 간부들의 리더십이나 역량에 대해서는 아래 직원들로부터 다면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대부분 대기업에서는 다면 평가 결과를 승진이나 연봉에 반영하지 않는다. 한 대기업 인사담당자는 “다면 평가를 받아보면 개인의 편견에 의한 비난이 주를 이루거나' 뒤탈을 걱정해 솔직하지 않게 쓴 내용이 많다. 그래서 참고 자료로만 이용한다”라고 말했다.

이미 오래 전에 객관적이고 투명한 인사평가제도를 도입해 그 결실을 보고 있는 기업으로는 대한통운을 꼽을 수 있다. 대한통운도 모든 직원의 업무 성과를 객관적 지표로 평가하고' 이와 함께 한 사람에 대해서 여러 사람이 평가하는 다면 평가를 실시한다. 과·차장으로 구성된 인사평가위원회는 전국에서 올라온 평가 자료를 분석해 최종 고과를 매긴다. 인사평가위원회는 부장급 이상의 간부 성향에서부터 실적까지 상세하게 파악해 놓고 있다가 결원이 생길 때 후보자를 추천한다.

인사팀 정기호 부장은 “과거에는 승진이나 인력 배치에 경영진의 입김이 상당히 작용했다. 그러나 이 제도를 도입한 뒤 ‘밀실 인사’나 ‘오더 인사’라는 말이 사라졌다”라고 말했다. 이 제도를 도입한 뒤' 가장 알짜 사업소여서 임원들만 가는 인천지사에 부장급 실무자가 지사장으로 발령되기도 했다. 대한통운은 1998년에 8백94억원 적자를 내고 법정관리에 들어갔지만' 인사 시스템을 바꾼 뒤 3년 내리 사상 최대 경영 실적을 올리며 흑자로 돌아섰다. 또 최근에는 노동부가 주는 신노사문화 대상까지 받았다.

이처럼 인사 평가는 평가 그 자체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성과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휴먼컨설팅 박찬호 상무는 “얼마나 공정히 평가해 적당한 보상을 하느냐에 따라 직원들의 생산성이 달라지므로 제대로 된 인사평가제도를 확립하지 않고서는 경쟁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라고 지적했다. 박상무 말대로 국내 기업들은 이제 겨우 합리적인 인사 평가에 착수한 셈이다. 새로 도입한 인사제도를 얼마나 합리적으로 운영하느냐에 따라 회사의 경쟁력이 판가름 난다.

안은주 기자 anjoo@sisapress.com